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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공학자 네베클로프스키의 보편적인 다뉴브 강 11 &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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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공학자 네베클로프스키의 보편적인 다뉴브 강 11 & 12

원남 2017. 5. 4. 00:54

11. 자신이 받은 모욕을 기록한 사람


P. 101

  성당을 소개하는 수많은 안내서 가운데, 페르디난트 트렌이 쓴 정확하고 꼼꼼한 안내서가 단연 눈에 띈다. [...] 그 해박한 소책자 『울름 성당, 그에 대한 정확한 기술記述』(1857)의 표지에 운명의 장난인지 인쇄업자가 실수로 페르디난트 트렌의 이름을 적는 걸 잊어버렸다. 빈 국립박물관알베르틴 박물관에 보관된 견본품에만 그 이름을 연필로 적어놓았다.

 페르디난트 트렌은 19세기의 건축가로, 울름 대성당을 재건하는 데에 큰 일조를 하였다. 


 사진출처


  알베르틴 박물관이라기보단 우리나라에서는 알베르티나Albertina라고 말한다. 빈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이다. 장소는 아래 지도에서 확인해보자.



12. 그릴파르처와 나폴레옹


P. 105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엘힝겐 수도원 근처에는 1805년 10월 19일 '울름의 항복'이 일어났던 곳, 즉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불행한 마크"라고 말했던 오스트리아 장군이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던 곳이 잇다. 기념비는 나폴레옹 전쟁의 전몰자들인 프랑스 군인과 그 당시 황제 나폴레옹과 연합했던 독일 내 여러 주의 군인들을 기념하고 있다.

  엘힝겐Elchingen은 울름에서 7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고, 엘힝겐 수도원(獨)Kloster Elchingen, (英)Elchingen Abbey은 19세기까지 유지된 수도원이다. 

  


  각각 르네 테오도르 베르통과 샤를 테브난이 그린 <울름의 항복>이라는 그림이다. 울름 전투 막바지에 마크 장군과 2만 3천명의 오스트리아 군사가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였다. 

P. 105

  다뉴브 강의 이 지점은 회흐슈테트 전투(혹은 블렌하임 전투)처럼 큰 전투들이 벌어졌던 무대다.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외젠과 말버러 대공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지던 때인 1705년, 태양왕의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회흐슈테트 전투는  2번에 걸쳐(1703, 1704년) 일어났기 때문에 블렌하임 전투를 가리킬 땐 제 2차 회흐슈테트 전투라고 적시해야 옳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크리시Edward Creasy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역사적인 승리로 평가하였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 

<The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Edward Creasy 著, 1851

P. 242

  Had it not been for Blenheim, all Europe might at this day suffer under the effect of French conquests resembling those of Alexander in extent and those of the Romans in durability.

  프랑스 군대는 이 전투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무적신화가 깨졌다.


P. 106

  그릴파르처가 일기에서 그의 분신 픽슬뮐너를 호감가지 않는 인물로서 또다른 나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알렉산더 픽슬 밀너Alexander Fixmillner는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다. 그릴파르처 이전 세대 사람이기 때문에, 그릴파르처의 본보기임을 까먹으면 안된다. 이 사람에 대한 자료가 많이 없다. 

P. 107

  그러나 이 문화는 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병렬적인 행동들'의 공허함을 드러내고 카를 크라우스처럼 뒤집힌 세상을 찬미했지만, 점차 소멸되어가는 그 전체, 세상을 뒤집어 보았던 바로크의 그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우주를 간과하지 않았다. 

 아마도 1부 5장에 나오는 '평행선운동위원회The committee of the parallel action'에 나온 것을 옮겨적으려다가 혼동이 있던 게 아닌가 싶다. 현 페이지에서 밑줄 친 부분을 평행선운동이라고 적시하거나, 앞선 위원회 이름을 병렬적행동위원회로 고쳐야 하지 않았을까? 로베르트 무질musil의 parallelaktion을 표현하는 문장인데, 두 개가 서로 다르게 표기된 건 번역가분께 의아함을 자아낸다.

<카를 크라우스의 풍자적 인용과 언론비판>, 라영균 著, Foreign Literature Studies, 29, 2008년 2월

  카를 크라우스는 평생 혼자 집필과 발행을 주관해온 잡지, 『횃불』을 통해 세기말 빈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를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크라우스의 비판은 철저하게 풍자적이다. 그가 즐겨 쓰던 풍자수법은 상투적인 표현을 신문기사에서 인용하여 거기에 주해를 붙이거나 혹은 특별한 표시를 하여 허위 사실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카를 크라우스는 20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풍자가로, 횃불Die Fackel이라는 잡지를 통해 비난의 화살을 풍자적으로 연신 퍼부었다. 그가 세상을 찬미했다는 언급은 어찌 보면 풍자의 형식, 반전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베를린에 횃불 잡지 발간 기념 명판도 있을 정도. 


 사진출처

P. 107

  사실 나폴레옹을 경험하면서 비극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최후』(1825)가 태어났다. 그 작품에서 그릴파르처는 합스부르크가의 시조이자 초개인적인 업무로서 겸손히 권력을 행사햇던 루돌프 왕과,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권력을 원하고 행사했던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왕을 대립시켰다.

  그릴파르처의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최후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라는 작품은 루돌프 1세가 오타카르 왕을 이겨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때를 소재로 하여 이 작품을 완성했다. 


P. 109

  요제프 로트는 자신의 소설 『100일』에서 황제의 조루증이라는 옛날 가십거리를 다시 취해 불안에 안달복달하는 조급증으로 이를 상징화한다. [...]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이미 했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제프 로트는 기자생활을 하다가 유럽을 여행하는 특파원이 되면서, 유럽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소설들을 발간하며 작가로 이름을 떨쳣다. 알콜 중독과 정신분열증이 그를 괴롭게 하였던 전력이 있다. <엉터리 저울추>, <라데츠키 행진곡> 등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엇다. 그리고 <100일>이라는 이름으로 축약되기엔 원제는 The Ballad of hundred Days다. 다시 한 번 고려해주시기를 바란다. [2017-05-08 수정] 원제가 <Die Hundert Tage>라서 상관이 없으므로, 다음부터는 더 잘 조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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