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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 기록
1부 홈통 문제 5. 힌터나치오날 중부유럽이냐 전체주의 독일의 중부유럽이냐? (2) 본문
P.36 ~ 44 中 P.39 ~ 44 탭이 너무 많아져서 부득이하게 한 챕터가 10페이지가 안됨에도 불구하고 2개로 또 쪼갰다. 미분하는 게 아닌데...
P.39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전쟁은, 하인리히 폰 즈르비크가 1942년 펴낸 책에서 말한 '독일통일Deutsche Einheit'을 분열시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상속자로 사실상 여제(여자 황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지냈다. 오스트리아는 나중에 프로이센 동맹에게 호되게 당하여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세금을 원활히 벌던 도시를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P.39 - 40
일차대전 중 합스부르크가 몰락 이전에, 호프만슈탈은 '오스트리아인'을 찬양하고 오스트리아인의 전통적 자기비판과 역사에 대한 회의적 사고를 극찬하면서, 이들을 도덕적으로 광적이고 변증법적 사고를 지닌 국가주의 '프로이센인'과 비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라고 쓴다. (여태 나왔던 서적들을 보면 다 스라고 썼다.) 참고하자. 시인이고 극작가며, 슈테판 츠바이크한테 극찬을 받았다. <엘렉트라>로 유명. 우리나라에선 이 작품은 아직 안나왔고, 그의 다른 작품이 지식공작소 출판사에서 얇게나마 나온 바 있다.
<Hugo von Hofmannsthal and the Austrian idea : selected essays and addresses, 1906-1927>(David S Luft 著, 2011) P. 104
Social Structure: (일부만 발췌)
Prussia: Homogeneous officialdom: bearers of one spirit.
Austria: Heterogeneous officialdom: no prescribed way of thinking and feeling.
사회 구조:
프로이센: 동등한 관료사회: 단지 하나의 정신을 전달하는 자들
오스트리아: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는 관료사회: 생각과 느끼는 것에 대해 규정해놓은 방법이 없음
동일 저서 P.105
The Individual:
Prussia : Strong in dialectic. Schoolmasterly.
Austria: Rejection of dialectic. Self-irony.
개인:
프로이센: 변증법에 강함. 학교 선생님스러움.
오스트리아: 변증법을 거절함. 자가질책.
위 인용은 <다뉴브>책에 있는 오스트리아인과 프로이센인의 속성을 언급한 부분만 인용했다. 위의 첫 번째 인용을 볼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중 이 챕터의 제목에 언급되는 힌터나치오날hinternational에 더 적합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되는가? 착실하게 이 책을 따라읽었을 경우 답은 이미 나왔다. 두 번째 인용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변증법, 자가비판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 지를 엿볼 수 있다.
P. 40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한 오스트리아의 끈질긴 이 연구는 독일적 요소와의 동일시를 거부하면서 나온다. 그 결과 안드리안베르부르크 남작이 이미 19세기에 말했듯, 오스트리아 민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자기성찰은 궁극적으로 '오스트리아적인 것'은 정의할 수 없고 이 불가능성 자체가 그 본질이라는 발견, 즉 귀가 솔깃한 자기폄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다뉴브> 영어판을 보면 Baron Andrian-Werburg라고 되어 있다.
<The promotion of an Austrian identity 1918-1938> (Bulloch, J.A.McTG 著 박사논문, 2002) P. 37
Although a negative perception of Austria's economic situation can to a large extent explain why the Republic met with little enthusiasm in her early years, it cannot in itself illustrate the specific problems posed by the identification with an entity called `Austria'. To understand these and to set Seipel's construct of Austrian identity in context, it is important to examine briefly the genealogy of the name `Austria'. Friedrich Heer's assertion, that no other historical entity in Europe has been so tied to an identity problem as Austria, is well illuminated by the words of Viktor von Andrian-Werburg:
오스트리아라고 불리는 개체를 오스트리아라는 이름과 동일시할 때 생기는 특정한 문제들을 스스로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하고, 문맥상으로 자이펠이 말한 오스트리아의 아이덴티티 구성을 바로세우기 위해서, Austria의 이름의 계보를 간단히라도 조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만큼 아이덴티티의 문제와 관련있던 역사적인 개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던 Friedrich Heer의 주장은 Viktor von Andrian-Werburg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The multinational empire: nationalism and national reform in the Habsburg monarchy, 1848-1918>(Robert A. Kann 著, 1977) 1권 P. 3 (아래 문단은 이 저자에 의해 인용된 Viktor von Andrian-Werburg의 주장이다.)
Austria is a purely imagined name, which means neither a distinct people nor a land or nation. It is a conventional name for a complex of clearly differentiated nationalities... There are Italians, Germans, Slavs, Hungarians, who together constitute the Austrian Empire. But there exists no Austria, no Austrian, no Austrian nationality, and, except for a span of land around Vienna, there never did.
오스트리아는 사람의 이름도 땅도 국가의 이름도 아닌 순전히 상상속의 이름이다. 분명히 구별되는 민족의 복잡함에서 (힌트를 얻어) 이름을 딴 관용적인 이름일 뿐이다. [...] 오스트리아 왕국을 함께 건설한 사람들은 이탈리아인, 독일인, 슬라브인, 헝가리인이다. 그러나 거기엔 오스트리아도, 오스트리아인도, 오스트리안 민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비엔나(빈)을 둘러싼 나라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The promotion of an Austrian identity 1918-1938> (Bulloch, J.A.McTG 著 박사논문, 2002) P. 41
France existed as the land of the French, the nascent Germany as the land of the Germans; Austria, by contrast, was not the land of the Austrians, but that of the House of Austria. This fact must have had a highly significant impact on the question of Austrian identity. For whereas a French, German or Hungarian nation clearly existed, an Austrian one did not. The Monarchy was home to Germans, Magyars, Czechs, Slovaks, Italians, Slovenes, Poles, Serbs, Croats, Ruthenes, Romanians, Jews, but who were the Austrians? Were they inhabitants of the original duchies, of the Monarchy as a whole, or of Cisleithania? One could even argue that no Austrians existed at all; even Franz Joseph once famously insisted that he was a German prince.
프랑스는 프랑스 사람들의 나라에서, 초창기 독일은 독일인들의 영토로 존재했다. 허나 그와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아닌, 오스트리아 가문(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다. 이 사실은 오스트리아 아이덴티티의 질문에 대해 매우 크고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독일, 헝가리 국민들은 분명히 존재했던 반면,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제국은 독일인, 마자르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루마니아인, 유대인의 고향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은 어디있는가? 그들은 원래 있던 공작들의 영토의, 혹은 이들 민족 전체의, 아니면 시스라이타니아의 주민들이었던가? 심지어 혹자는 오스트리아인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심지어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자신이 독일 왕자였다는 걸 주장했던 걸로 한때 유명했다.
(ㅜㅜ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책의 인용구들...)
영어판 <다뉴브>에 보면 바로 이전 세기(the last century)에 Andrian-Werburg집안 중 한 사람이 이런 언급을 했다고 한다. <다뉴브>는 1980년대 중반 작품이기 때문에, 19세기 사람인 Viktor Franz von Andrian-Werburg일 것이다.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아서, 이분의 주장이 일부 깃들어있는 어느 한 분의 박사논문 및 그가 인용된 구절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그 민족들이 자신의 영토에서 나라를 세웠다기보다는, 주변국에 의해서 세워진 melting pot의 형태라는 것이다. <다뉴브>에서 제시된 2가지 주장, 즉 호프만슈탈이 극찬했다던 오스트리아인의 전통적 자가비판(traditional ability to laugh at himself)과 안드리안베르부르크 남작이 말한 인용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아성찰에서 수렴되는 자기폄하(self-denigration)가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P. 41
1938년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독일의 리더십과 진보주의 정신 사이의 공존 관계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 병합/합병은 1938년에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반강제로) 병합했을 때의 사건을 가리킨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모두 뭉쳐야 하므로, 제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조그매진 오스트리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나보다.
P. 42
즈르비크는 중부유럽 지역에서 독일 민족과 타민족이 평화로이 공존해야 하며, 다른 모든 민족의 생존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독일 민족이 중부유럽을 이끌어갈 민족, 문화와 보편성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민족의 것이었다.
앞 포스팅에 하인리히 즈르비크에 대해 위키피디아만 걸어놓았는데, 아무래도 좀 더 얘기를 진행해야겠다. 자료가 많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출처가 불명확한 위키피디아 내용을 가져오겠다. 이 사람은 위의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시 나치 독일제국에 "독일인들이 몇 천년동안 그리던 꿈이 현실로 되었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P. 43
그런 독일의 보편주의, 질서를 열망하면서도 은밀히 혼란을 바라는 엉클어진 뒤틀린 내면성을 가리키기 위해 토마스 만이 말했던 "절망적으로 독일적인" 보편주의는, 유럽 문화의 위대한 페이지, 즉 삶과 가치 사이, 생존과 질서 사이에서 나온 긴장을 떠안고 있는 강력한 독일 문화와 결부된다.
영어판 <다뉴브>에서는 이를 "desperately German universalism"이라고 번역을 해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토마스 만이 이에 대해 언급했던 게 나오지 않는다. ㅠㅠ
P. 43
우리 모두는 큰 전쟁들을 통해 세계정신Weltgeist을 보도록 교육받았고,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로부터 이를 포착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세계정신이 아직 잠들어 있다거나 이제 겨우 유년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말이다. [...] 헤르더는 인간 정신의 영원한 보편성이라는 사상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단 하나의 모델을 위해 인간 정신을 구현한 너무나 다양하고 다른 형태들 그 어느 것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세계문학의 변화들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사를 따라가고 싶어했다.
먼저 세계정신은 전체(혹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을 말한다. 헤겔이 역사학적으로 풀어서 세계정신을 자기실현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건 세계사를 주장한다. 세계영혼Weltseele이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쓰기도 한다.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스승이었던 칸트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저서가 내려오긴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처럼 유명한 저서는 딱 생각나기 어렵다. 그래도 수많은 나라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괴테를 가까운 친구로 두기도 했다.
<Unsterblichkeit und Identität beim frühen Herder> (Tino Markworth 著, 2005) P. 119
Eines der zentralen Elemente der altägyptischen Vorstellungswelt ist nun das Konzept der Weltseele, das eben nicht nur bis Platon, sondern weiter bis zur altägyptischen Philiosphie zurückverfolgt werden konnte, wie Herder spätestens Ende 1768 durch die Lektüre von Paul Ernst Jablonskis Pantheon Aegyptorium erfährt. Herder ist von dieser Entdeckung so begeistert, dass er im Dezember 1768 ein Gedicht mit dem Titel “Alte Aegyptische Philosophie” verfasst. Dieses Gedicht ist im Kontext unserer Fragestellung von besonderer Bedeutung, lässt sich hier doch konkret der Nachweis erbringen, dass Herder bereits vor 1769 das Konzept “Weltgeist”, das er explizit im Gedicht erwähnt, auch als Teil der “alten ägyptischen Philosophie” betrachtet und es darüber hinaus im Kontext eines Unsterblichkeitsmodells thematisiert:
고대이집트의 상상속 세계의 주요 요소 중 하나는 세계영혼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겨우 플라톤시대까지가 아니라 고대이집트철학보다 더 한 시대까지도 뒤쫓아갈 수 있게 한다. 마치 헤르더는 늦어도 1768년 말에 폴 에른스트 자블론스키Paul Ernst Jablonski의 판테온 이집트인 강의를 통해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헤르더는 이러한 발견에 매우 감격하여 1768년 12월에 "고대 이집트 철학"이라는 시 한 편을 썼다. 이 시는 특별한 의미에 대한 우리들의 질문이라는 측면에서 문맥을 이어간다. 헤르더는 1769년이 되기 전에 이 시에서 정확하게 언급하는 "세계영혼"이라는 개념 및 "고대 이집트 철학"의 일부분으로써 그 개념을 숙고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문맥상에서 불멸적인 모델의 하나로 이를 대외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초기 헤르더에 대한 서적을 인용했다. 이 인용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철학이라는 시를 씀으로써 헤르더는 세계영혼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명시하였다. 위의 다뉴브 인용 중 "세계문학의 변화를 통해서" 헤르더가 인간의 정신사를 따라가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가 강의를 통해 발견한 철학을 시로 표현한 것은 마그리스가 생각하는 헤르더의 관념과 뜻을 같이한다고 봐야 한다.
P. 44
모든 질풍노도 작가처럼 헤르더는 강을, 비옥한 생명력을 주면서 계곡을 흐르는 젊고 거친 급류를 좋아했다.
나는 문학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질풍노도 작가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사춘기 감성이 폭발하는 분들을 일컫는 줄 알았다. 미안해요 내 두뇌야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이라는 18세기 문학사조의 일부는, F.M.클링거Friedrich Maximilian Klinger가 쓴 희곡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다. 당시 독일에서 팽배했던 프랑스스러운 궁정 문화를 항의하고,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마인드를 버리고 감정이나 상상력 등을 개방하자는 목표를 지녔다. 주로 괴테나 헤르더가 담당했다.
P. 44
사회주의 안에서 자신의 계급 지평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위대한 헝가리 귀족 카로이 백작이 1918~1919년 헝가리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후 런던에 망명하여 식비 마련을 위해 외투를 팔아야 했을 때도 그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떤, 그 굳건한 다뉴브 연방 말이다.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진 뒤 독립된 헝가리의 제 1대 대통령이었지만 1919년 7월부터 프라하, 유고슬라비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의 동상이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있다.(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조각상으로 남은 네 명의 정치가는 현대 헝가리의 정치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로이를 비롯하여 코수트Lajos Kossuth, 라코치Ferenc Rakczi, 나지Imre Nagy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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