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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공학자 네베클로프스키의 보편적인 다뉴브 강 24. 거대한 바퀴 본문

공부/<다뉴브>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읽기

2부 공학자 네베클로프스키의 보편적인 다뉴브 강 24. 거대한 바퀴

원남 2017. 12. 20. 10:00

p. 149 - 154  


  이번 도시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슈트라우빙Straubing이라는 도시다.



p. 149

  슈트라우빙 근교 성 베드로 성당 묘지, 마치 정원처럼 성당 주변에 퍼져 있는 비석들은 계급에 자부심을 갖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삶들을 증언해주고 있다. 맥주 제조인이며 시의원이었고 †1826년 바이에른 방위군 중위였던 아담 모어도 이 묘지에 누워 있다. 계급에 대한 자부심은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경건한 조화를 이루도록 해준다.


  성 베드로 성당St. Peter Kirche에 묘지Friedhof가 존재하며,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http://www.st-peter-straubing.de/friedhof.html

  아담 모어를 검색해보면 한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기상 맞지 않는다. 본편에 나오는 사람은 방위군 중위Bavarian National Guards가 된 때가 1826년이다. 내가 검색한 아담 모어(위키피디아 링크)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바이에른 보병의 일원이었으며 나치의 편에 서서 농업쪽을 담당했다고 나온다. 아마 다른 사람이겠거니 하는데 생각보다 적당히 겹친다. 영문판에도 이리 나와있었으니, 이 사람이던지 아니면 이름도 커리어도 비슷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문에도 그렇고 영문판, 한국판 본문에 보면 1826년 앞에 십자가 모양이 있던데, 이건 왜 있는 건지 모르겠다. 


p. 149

  예배당 세 곳 가운데 하나에 아그네스 베르나워의 무덤이 있다. 아그네스 베르나워는 합스부르크가 이발사의 딸로, 미모가 뛰어났다. 1435년 10월 12일,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공작이 아그네스에게 마녀라는 죄목을 씌워 그녀를 다뉴브 강에 익사시켰다.




  아그네스 베르나워Agnes Bernauer는 아주 예쁘다고 알려져 있으며,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다. 그러나 계략에 휘말린 나머지, 그녀의 시아버지인 에른스트 공작에 의해 마녀라는 죄목으로 강물에 빠져 숨을 거둔다. 

  에른스트 공작Herzog Ernst은 자신의 아들을 다른 여자랑 결혼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판사를 매수한 끝에 아들이 마상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후 아들인 알브레히트가 아그네스를 슈트라우빙으로 데려가서 결혼한다. 에른스트 공작(그녀의 시아버지)는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고, 위 문단과 같은 이유로 자신의 아들이 없던 사이에 그녀를 죽임에 빠트린다. 알브레히트는 화가 나서 사촌과 협약한 후 아버지인 에른스트 공작과 전쟁을 벌였고,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의 중재로 화평을 맺었다. 그 연유로 알브레히트는 에른스트 공작이 원하던 여자와 결혼하고, 에른스트 공작은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위한 성당을 짓고 매년 미사를 올렸다. 마녀사냥을 당한 그녀를 기리는 축제가 100여년 이상 진행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독일 내에서 많이 유명한 존재인가보다. (나도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에 대한 얘기는 본문 p.150에도 잘 나타나있다.


p. 150 - 151

  명목상 죄목은 그녀가 마녀라는 거였다. 계몽주의 세기말에 글을 쓴 안티콰리우스는, 이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더는 아그네스를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훌륭한 중산계급시민 출신인 안티콰리우스는 아그네스가 마녀라는 미신을 세속적으로 해석하여, 그녀가 '부끄럽게도' 알베르트 공작을 유혹했다고 경멸적인 어조로 말했다.


  안티콰리우스는 요한 헤르만 딜헬름Johann Hermann Dielhelm을 가리키고, 본문에선 1부 4장, 2부 5장에서 두 차례 나온 바 있다. 그가 알베르트나 에른스트 공작에 대해 얘기한 서적이 18세기에 존재하지만, 아그네스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p.151

  그 대신 1851프리드리히 헤벨이 훌륭한 시적 능력을 발휘해 비극을 썼다. 헤벨은 맑고 아름다운 여인을 찬양해 마지안핬다. [...] 달리 말해 혼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헤벨은 국가이성의 파토스에 열광한다.


  19세기 독일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헤벨Christian Friedrich Hebbel은 1851년 12월부터 3개월 동안 "아그네스 베르나워(베르나우어)Agnes Bernauer"라는 비극을 집필했다. 위키백과 참조 : https://de.wikipedia.org/wiki/Agnes_Bernauer_(Hebbel)


p. 151 - 152

  개인의 위엄과 순수함은 에른스트 공작과 헤벨처럼 전체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의 숭고한 신성함을 증폭시키는 데 이용될 뿐, 전체는 늘 정당화된다희생되는 개인이 순수하고 찬탄할 만한 대상일수록, 전체는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

  주관의 소멸, 주관의 자기소멸을 찬양하는 객관의 파토스가 의심스럽듯, 개인의 희생을 찬양하는 것 역시 의심스럽다. 전체를 과장하는 모든 것은 안티콰리우스의 속물적인 저속함을 숭고하게 위장하고 있다. 잔인한 말을 마구 내지르면서 한 사회의 집단적 요구와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적 요구 사이의 관계를 패러디하는 객관의 수사학이 있다


  아래쪽에 굵은 표시로 해놓은 부분은 마음에 들어서 줄 쳐놨다. 마녀사냥은 현대에서도 충분히 언론, 여론 등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간과해서는 안 된다.


p. 152 - 153

  세계정신의 법적 대리인 명단은 없어도 그 타이틀을 불법 남용한 사람들의 혼란은 끝이 없다. 시대에 발맞추어 걸어가고 시대의 행렬에 끼고자 하는 갈망은, 모든 선택과 충돌 혹은 자유로부터 벗어나려는 퇴보적인 동경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확신하며 결백을 주장한다. 헤벨의 비극에서 시는 이런 착각, 이런 책무 거부의 신호다. 비극에서 아그네스만 결백한 게 아니라 그녀를 죽게 한 사람 역시 결백하다. "마치 꿈을 꾸듯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이 그렇다." 에른스트 공작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굵게 표시한 문장의 뒷부분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그녀를 죽게 만든 사람도 결백하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치 정권의 상부가 지시한 것을 그대로 이행했던 수많은 하급병사나 간부까지도 결백하다고 믿을 것인가? 굉장히 실망할 뻔 했으나, 이는 번역과 나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 이해하기 쉽도록 방금 굵게 친 문장을 영문판으로 보자.


p. 112 (영문판)

  In Hebbel's tragedy poetry is the Siren of this illusion, this abdication: not only is Agnes innocent in the play, but above all s is her murderer.


  굵게 표시한 뒷문장이 앞문장의 "이런 착각, 이런 책무 거부"를 의미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 다소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두 문장으로 나눠서 오해하게끔 만들었을까, 아니면 "거부의 신호다: "로 바꾸어서, 차라리 뒤에 있는 게 "이런 착각, 이런 책무거부"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음을 표기해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헤벨의 비극에서 시는, 이 극의 아그네스가 결백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죽게 한 사람들 또한 결백하다는 환상, 책무를 기권한다는 신호다.


  이렇게 하면 헤벨의 비극에서 아그네스를 죽인 사람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되었음을 시를 통해 표현함을 알 수 있다.


p.153

  그릴파르처 역시 국가이성에 대한 희곡 『톨레도의 유대 여인』을 썼다. [...] 그러나 그릴파르처는 막스 베버가 말했듯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를 대립시키면서 두 논리 모두 옳음을 보여주었고 그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두 윤리의 충돌이 해소될 수 없는 비극적인 문제이기에 굳이 화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막스 베버는 책임윤리the ethic of responsibility(Verantwortungsethik)와 심정윤리the ethic of conviction (Gesinnungsethik)를 분리하여 생각했다. 책임윤리는 자신이 행한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심정윤리는 책임을 생각하기에 앞서, 해당 행위에 대해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생각하며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수함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이다. 철학자는 정말이지^^... 자세한 건 다른 포스팅을 통해 보셨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 베버가 말한 윤리의 두 가지는 책임윤리와 심정윤리라는 용어가 이미 존재한다. 영문판도 각각 베버가 주창한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본문도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라는 말 대신, 책임윤리와 심정윤리라고 써야 옳지 않을까?


p.153 - 154

  오스트리아인 그릴파르처에게 보편적 역사는 독일사람 헤벨의 경우처럼 보편적 심판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심판은 이 세상에서 단순히 일어나는 일과 같은 게 아니다. 사건들은 가치와 일치하지 않으며,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실과 합리성을 동일시하는 헤겔식의 사고에 맞서 오스트리아 문화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상황은 늘 예상과 달리 전개될 수 있으며, 역사도 가정에 따라 달리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릴파르처의 희곡들에서 군주는 빠져 있거나 시대에 뒤처져 있다. 엄밀히 말해 군주는 없고 있다 하더라도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나중에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말들이 줄을 이어서 밑줄 쳤다.


p. 154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교훈이다. 슈트라우빙에서 오페라 <마술피리>의 대본작가, 빈의 동화 같은 대중 희극을 만든 시인 시카네더가 태어났다. 그는 모든 현실을 요리조리 해체해서 가능성 있는 또다른 숨은 현실로 창작해내고 객관의 파토스에, 아그네스 베르나워 위를 지나갔던 걷한 바퀴에,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떨리는 음을 대립시켰다.


  시카네더Emanuel Schikaneder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마술피리에선 연출가로 활약한 바 있다.

  파파게노Papageno, 파파게나Papagena는 <마술피리>에서 각각 바리톤과 소프라노가 활약하는 등장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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